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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가 막장극에 빠지는 이유 (공감, 현실반영, 카타르시스)

by creator04905 2025. 11. 20.

얼마 전, 친정엄마가 계신 본가를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엄마는 올해 여든셋, 연세가 꽤 많으신 편인데요. 저는 엄마가 제가 온다는 걸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TV 앞에 앉아 아침드라마에 푹 빠져 계시더군요. 제가 본 장면은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 장면이었죠. 저는 어이없다는 듯이 "엄마, 이게 뭐가 재밌어? 아이고야!"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엄마는 오히려 진지하게, "아니야, 나는 너무 재밌어." 하시더라고요.

그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왜 우리 엄마처럼 중년, 노년층 여성들은 막장 드라마에 그렇게 빠져드는 걸까? 자극적인 내용은 좀 과하지 않나 싶기도 한데, 오히려 이 연령대 여성들에겐 큰 즐거움의 원천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단순히 ‘한가해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감정을 이입한다

막장 드라마라고 하면 누구나 자극적인 이야기, 말도 안 되는 전개, 비현실적인 설정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들이 매일 같은 시간, 꾸준히 편성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중년과 노년의 여성 시청자들에게 이 콘텐츠는 단순한 ‘재미’ 그 이상입니다.

주인공이 시어머니에게 구박당하거나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복수하고 통쾌하게 승리하는 이야기. 이런 서사는 현실에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줍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참고 살아왔는지, 당신은 몰라도 돼!”

엄마 세대는 그 누구보다 ‘참고 사는’ 삶을 살아오셨죠.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고, 항상 누군가의 엄마, 아내, 며느리로 살면서 자신의 감정은 뒤로 밀어둬야 했습니다.

막장 드라마 속에서는 그동안 꾹 참고 살아온 감정들이 마치 대리 표출되는 것처럼 터져 나옵니다. 현실에서는 상상도 못할 대사들이 시원하게 터지고, 주인공이 억울함을 딛고 복수하는 과정을 보며, 시청자는 감정적으로 함께 울고 웃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들 위에 설 거야. 두고 봐!”

드라마 속 자극보다 중요한 건 ‘공감’과 ‘해소’

막장극이 인기를 끄는 건 설정이 황당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현실 같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의 갈등 구조는 매우 익숙합니다. 시댁과의 갈등, 자식 문제, 불륜, 돈 문제, 계급 차이… 주부들이 살아오면서 부딪힌 수많은 갈등이 극대화되어 재현되죠.

“우리 집에 들어온 이상, 너는 이제부터 내 밥이야.”

예를 들어 남편 몰래 외도를 저지른 여주인공이 결국 들통나는 장면은 자극적이지만, 그 장면을 보며 ‘내 상황은 아니지만 어딘가 익숙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접 겪은 일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나 뉴스 속 사건이 떠오르며 몰입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몰입은 일종의 정서적 해소로 이어집니다. 말로 하지 못한 분노, 마음속에서만 되뇌던 억울함이 드라마 속 대사를 통해, 또는 복수 장면을 통해 대리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나, 이제는 더 이상 당하지 않아.”

그러니 '말도 안 돼!' 하면서도 끝까지 보게 되는 거죠.

막장이라는 단어가 감추는 정서의 깊이

우리는 종종 막장 드라마를 깎아내리곤 합니다. "그게 무슨 드라마야?" "작위적이고 유치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죠. 하지만 정작 그 드라마들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꾸준히 사랑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막장이라는 단어는 자극적인 전개를 뜻할 뿐, 그 드라마가 전달하는 정서까지 저급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극적인 장치 속에 진짜 감정이 담겨 있기도 하죠.

“진심은 통한다고 했지. 이제 내 진심이 너한테 갈 거야.”

감정을 누르고 살아온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정서적 공간을 되찾는 과정, 그것이 바로 막장 드라마가 갖는 숨겨진 힘입니다.

루틴, 공감, 해소가 만드는 충성도

막장극은 자극적인 장면만으로 시청자를 붙잡지 않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방송되는 루틴, 주인공과 감정을 함께 나누는 공감, 스트레스를 잠시 잊게 만드는 감정 해소. 이 세 가지가 결합되며 시청자들은 점점 빠져들게 됩니다.

“이 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 같아.”

특히 중년 이후의 여성 시청자들에게는 하루 중 자신의 시간에 몰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루틴이 되기도 하죠. 나이가 들수록 정서적으로 자극받을 일이 적어지는데, 드라마는 그 자극을 건강하게 전달해주는 매개가 됩니다.

한국 드라마' 모두다 김치'
모두다 김치의 한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