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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끝났다고 말하면서, 끝내 사랑한 사람들

by creator04905 2025. 12. 16.

“사랑이 밥 먹여주냐.”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웃지 못했다. 사랑 하나로도 숨이 벅찼던 시절에는, 이 문장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말이 농담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현실을 아는 어른의 말 같기도 했고, 인생을 여러 번 접어본 사람의 체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방영 중인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백번의 추억〉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랑을 다 써버린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정작 가장 오래 사랑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드라마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사랑은 정말,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별거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일까.

경도를 기다리며
어른의 사랑이란..

사랑이 별거 아니라고 말하게 되기까지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별거 아니었던 것’처럼 정리된다. 그래야 다음 사랑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지금의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사랑은 풋사랑이라 불린다. 그때의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있었다기보다, 사랑을 통해 나 자신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별은 아프지만, 어디까지나 성장의 일부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스물여덟에 다시 만난 사랑은 다르다. 그 사랑에는 책임이 따라붙고, 선택의 무게가 실린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인생을 걸어도 괜찮을 것 같은 착각이 생긴다.

〈경도를 기다리며〉의 두 사람은 바로 그 시기를 통과한 인물들이다. 사랑이 가장 뜨거웠고, 그래서 가장 위험했던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

인정하지 않는 사랑이 가장 오래 남는다

그리고 다시 이별한다. 이번 이별은 이전과 다르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고, 의욕으로도 극복되지 않는다.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고통,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바닥나는 시간. 사랑이 끝났는데, 삶은 왜 이렇게 아픈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순간들이다.

서른 후반에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를 애석하게 바라본다. 싱그럽던 청춘은 지나갔고, 삶은 각자의 책임으로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늙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또렷해진다.

사랑이 끝난 게 아니라,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녀를 덥지 않게, 춥지 않게, 비 맞지 않게, 바람에 시리지 않게 지켜주면서도 “별거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사랑을 정리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건 자기 마음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온 삶이 무너질 것 같기 때문에 그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남자의 이야기는 연애담이 아니라 감정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끝났다고 말하면서, 끝내 사랑을 놓지 못한 사람의 고백이다.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사랑, 〈백번의 추억〉

〈백번의 추억〉은 다른 방식으로 아프다.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지 않는다.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간다.

백번 버스 언니들과의 기억에서 출발해 고영례와 서종희, 그리고 한재필이라는 인물이 만들어진다. 그들의 첫사랑은 아름답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첫사랑은 흔히 둘만의 이야기로 기억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첫사랑은 그 시절의 공간, 사람, 공기, 냄새까지 모두 함께 데려간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더 아픈 이유는 사랑 하나가 여러 사람의 인생을 동시에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끝났다고 말하면서, 끝내 사랑한 사람들

두 드라마는 결국 같은 지점에 도달한다. 화살은 어긋나고, 운명은 바뀌며, 그들 중 한 명은 사라진다.

그리고 남은 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간다. 그리움은 추억을 부르고, 추억은 잊을 수 없는 그때의 시간을 소환한다.

힘들었지만 유쾌했고, 아름다웠지만 숨이 막히게 깊었던 시간들.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웠고, 그래서 더 찬란했던 과거의 나와 너, 그리고 우리.

그때, 분명 남루했던 우리는, 왜 그리 반짝였던 걸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전부를 걸 수 있었고, 잃을 게 없었기에 가장 빛났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시절의 우리는, 그 사랑 하나로 하루를 살아냈다.

당신에게도,
끝났다고 말하면서 끝내 놓지 못한 사랑이 있었나요.


출처

  •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
  • 드라마 〈백번의 추억〉